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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라이프

[Rafa Lab] 라파엘 나달 이야기 1 (주니어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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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설

 

라파엘 나달은 1986년 6월 3일에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아버지 세바스찬과 어머니 아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라파엘은 여동생 마리아 이사벨이다. 라파엘은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은 스페인 국가대표이자 FC 바르셀로나 축구선수였던 미구엘 앙헬 나달이다. 미구엘 앙헬 나달은 1994년 및 2002년 월드컵에서 스페인 국가대표로 대한민국전에 출전한 바 있다.

나달이 태어난 마요르카섬의 마나코르

또 다른 삼촌인 토니 나달은 라파의 첫 번째 테니스코치가 되었다. 그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였으며, 라파의 유년시절 스포츠에 대한 분명한 관심을 알아차렸다. 라파는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가족의 격려 덕분에 경기에 대한 애정을 빠르게 키웠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라파는 이미 지역 테니스 대회 12 세부에서 우승하였다.

 

그의 나이 보다 몇 살이나 많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이 토너먼트의 승리는 라파엘이 언젠가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될 분명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재능에 더해서, 그는 그의 또래들보다 앞서기 위해 그의 게임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토니가 라파엘에게 왼손잡이로 바꾸도록 격려한 것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였다.

 

몇 년 후, 12세의 나이에 라파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12 세부 테니스 대회를 우승해 나갔다. 어릴 적 라파는 재능있는 테니스 선수이기도 하였지만, 축구시합에도 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파는 학생이었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축구를 포기하고, 테니스와 학업을 병행하기로 결정한다. 2년 후 스페인 테니스 연맹에 의해 바르셀로나로 이주하도록 초청되면서 테니스에 집중하기로 한 선택을 곧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에 대해 라파의 가족은 다른 결정을 내렸다. 가족들을 그가 집과 가족들 곁에서도 더 강한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고,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연맹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의 가족에게 그러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족의 지원과 함께 성장하여 나달은 16세가 되기전에 두 번의 ITF 주니어 대회에 출전한 후, 15세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프로 경력

 

그의 첫 ITF 주니어 대회였던 윔블던에서 그는 준결승까지 진출하였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주니어 경력이었던 주니어 데이비스컵에서는 스페인이 미국을 제치고 우승하는 것을 이끌었다. 그해 라파는 ATP로부터 2003 Newcomer of the Year 상을 수상하였다.

 

2004 시즌

 

2004년은 라파는 프로로서의 커리어에 어울릴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호주오픈 3회전까지 진출하였고, 3회전에 그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레이튼 휴이트에게 패했다. 그 후 마이애미 마스터스에서 전설 로저 페더러에게 깜짝 승리를 거두었어나, 4라운데서 "라 레이나 폭격기" 페르난도 곤잘레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부상이 발목을 잡았는데, 왼쪽 발목의 피로골절로 인해 그해 롤랑가로스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라파는 2004년, 그의 나이 16세, 을 세계랭킹 51위로 마무리했다.

 

2005 시즌

 

라파는 2005년 호주오픈에서 레이튼 휴이트에게 다시 한번 패했다. 그 후 마이애미 오픈에서는 로저에게 2세트를 빼앗아 냈지만 승리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경기는 나달과 페더러 경력 전체를 놓고 봤을 때로 가장 인상적인 경기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패배들에도 불구하고 라파는 그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클레이 시즌의 나달은 24경기 연속으로 단식 승리를 가져가며, 이 부문에서 '오픈 시대'이후 안드레 아가시의 차지였던 10대 최다 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 이전까지 아마추어에게만 허락되던 그랜드슬램 대회에 프로선수들은 1968년부터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를 이른바, 테니스의 '오픈 시대'라고 칭한다.

 

그의 압도적인 승리 레이스 기간 동안 라파엘은 토르네오 콩드 데 고도 몬테카를로 마스터스와 로마 마스터스에서 우승하였다. 나달은 세계랭킹 5위를 기록하였고, 그는 이미 테니스 차세대 스타로 큰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결말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달의 테니스의 미래로서의 커리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렇게, 나달은 그의 첫 롤랑가로스를 2005년에 출전하게 되었다.

 

2005년 프랑스 오픈은 라파의 젊은 시절 커리어 중 가장 중요한 대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는 전문가의 예상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듭하였으며, 준결승에서는 페더러를 결승전에서는 마리아노 푸에르타를 꺾었다. " Incredable!"

 

나달은 그의 19세 생일 이틀 뒤에 롤랑가로스의 첫 번째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흙신의 첫 우승도장을 찍게된다. 라파엘 나달의 시그니처 '트로피 깨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기도 하였다. 15년 전 피트 샘프러스가 19세에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10대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다. 이제 라파는 3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잔디 시즌 게리 웨버 오픈 1라운드 알렉산더 와스케 와에게 패하면서, 그는 다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윔블던에서는 2회전에게 뮐러에게 패하면서 그 해 잔디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Rafael Nadal : The inspiration story of tennis superstar" 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2 편에서 계속

 

[Rafa lab] 라파엘 나달 이야기 2 ( feat. 로저 페더러)

첫번째 롤랑가로스 우승 2004년 첫 롤랑가로스 우승 후, 잔디시즌의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곧 바로 투어에 복귀하여, 스페인을 대표하여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출전하였으며, 마드리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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